영국의 역사학자 E.H. 카.

E.H.카(1892~1982)는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대를 졸업한 후 영국 외무부 소속 공무원(1916~1936)으로 황동했다. 외무부 시절 방대한 양의 소련 정부 자료를 소화해야 했던 그는 자료 더미에서 필요한 정보를 추려내는 경험을 통해 소련 전문 사학자가 갖춰야 할 심층지식을 쌓았다. 외교관 신분으로 경험한 1917년의 러시아혁명은 그에게 역사에 대한 관심을 일깨워주었고 러시아 문화와 역사에 심취하게 했다. 러시아혁명과 이후 소련의 성과를 긍정적으로 보고 심지어 히틀러와 스탈린의 전체주의 체제가 지니는 효율성을 인정하면서 서서히 왼쪽으로 기울었다.

그렇다고 본격적인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굳이 분류하자면 ‘휴머니즘적 마르크스주의자’ 혹은 ‘준마르크스주의자’ 정도였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를 ‘부르주아 역사학자’로 분류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후 ‘더 타임스’지 부편집장(1941~1946)을 거쳐 1948년 유엔의 세계인권선언 기초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1953년 케임브리지대 교수로 부임했다.

역사가로서 그의 최대 업적은 1950년부터 출간하기 시작해 1958년에 완간한 14권의 ‘소비에트 러시아사(1917~1929)’다. 또한 그는 ‘도스토옙스키전’(1931)을 비롯 ‘낭만적 망명가들’(1933), ‘마르크스전’(1934), ‘바쿠닌전’(1937) 등의 전기를 통해 19세기 유럽 지성사 연구에도 일가를 이뤘다.

1961년에는 케임브리지대에서 역사 일반에 대한 연속 강좌를 시작하고 그 강연은 그해 영국 BBC 방송을 통해 일반에 소개되었다. 카의 저작을 대표하는 명저 ‘역사란 무엇인가’는 그때의 강연 내용을 묶어 1961년 책으로 출판한 것이다.

카는 책에서 “역사의 서술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는 것”이라고 한 랑케 이래의 실증주의 역사학을 ‘사실 맹신’이라고 비판했다. 책의 첫 장 ‘역사가와 사실’에서는 역사를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규정했다. 여기에서 ‘현재’란 역사가의 이상과 해석을 말하고 ‘과거’란 사료를 의미한다.

카는 역사란 결코 지나간 일을 있는 그대로 밝히는 작업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가의 선택과 해석과 평가를 통해 과거 사실을 편집하고 의미를 다시 꾸리는 일이라고 설파했다. 그렇다고 카가 사료의 정확성을 부정하거나 무시한 것은 아니다. 그가 강조한 것은 “사료의 정확성은 의무이지 미덕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역사란 무엇인가’는 특히 우리나라 젊은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 유신 치하에서 반독재 투쟁을 하고 1980년대 우리 사회 변혁운동에 온몸을 내던지던 청년 학도들에게 이 책은 역사철학의 세계에 입문하는 바이블이었다.